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토 하지메 (문단 편집) == 생애 == 신센구미의 3번대 대장인 동시에, 주로 대내 밀정과 숙청 임무를 맡았다. [[세리자와 카모]], [[이토 카시타로]]나 5번대 대장 다케다 칸류사이, 7번대 대장인 타니 산주로 등, 조직내외를 막론하고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내부 암살자로서 유명해 이와 관련한 숱한 수수께끼를 남긴 의문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사이토 하지메 = 냉혹한 살수라는 지금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지금의 유명세와는 달리 실제론 신선조 내의 주요 사건에선 약간 동떨어져서 크게 눈에 띄는 활약상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신선조에선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콘도 이사미를 신선조 원년 멤버 중심으로 아이즈 번주에게 참소한 건백서 사건에서 그 이름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참모였던 이토 카시타로가 고료에지란 이름으로 조직을 분열시켰을 때 그와 같이 신선조 부대를 이탈하였고, 마침 그가 본대로 귀환한 직후 이토 카시타로가 암살되었기 때문에 조직 내 숙청이나 방첩업무에서 비밀스레 활약했다고 추정된다. 곧 옛 성과 차남이었던 사실을 따 야마구치 지로(山口次郞)으로 개명하였는데 후세의 팬과 역사 연구가들은 고료에지 시절 당시, 사이토 하지메가 콘도파의 스파이로 이토파의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스파이 역할을 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료에지에 같이 가담했던 동료는 사이토 하지메가 밀정이었단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단순히 여자 관계 때문에 조직의 돈에 손을 댔기 때문에 신센구미에서 도망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증거 및 사이토 하지메의 성격, 그리고 유신 이후에도 밀정일을 수행했다는 점을 보면 그런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기존의 학설대로 콘도파가 파견한 밀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신전쟁에서 부상당한 [[히지카타 토시조]]를 대신하여 임시로 대장이 되어 부대원을 이끌고 아이즈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보신전쟁 이후, 사이토 하지메의 삶은 실로 [[아이즈 번]]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할 수 있다. 최후의 이름이었던 후지타 고로란 이름도 아이즈와의 인연에서 개명한 것이었으며 2번의 결혼도 아이즈의 무가 여성과, 지인도 [[아이즈 번]] 사람들이 다수였으며 죽을 때는 그 유해가 아이즈에서 안치되는 등, 실로 아이즈인으로서의 삶을 완수하였다. 그의 인생 후반생은 아이즈란 키워드를 제하면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즈의 인연으로 점철되었다. 혹자는 그는 [[에도]]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고향을 만든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보신 전쟁 종전 후 아이즈 번이 더 북쪽의 도나미 번으로 전봉되자 도나미 번의 번사로 살다가 이후 도쿄로 이주해 경시청에서 경찰의 밀정으로 근무했다. [[서남전쟁]] 때는 경시대[* 서남전쟁 당시 경시청이 전국의 무사 9,500명을 순사로 특채하여 편성한 부대. 일명 징모순사대. 흔히들 알고 있는 발도대는 타바루자카 탈환을 위해 이 경시대에서 검술에 능한자를 선발해서 편성한 부대다. 발도대에 구 막부측 무사가 많았다는 인식과는 달리 실제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일파 사쓰마 번사들이 주력이었고, 사이토 하지메는 발도대에 소속된 적이 없다. 구 막부측 무사가 많았던 것은 주로 도호쿠 방면 무사들을 특채했던 경시대. 총원 9,500명 중 과반수인 5,200명이 도호쿠 출신이었다.]로 참전해서 전장에서 돌격대의 선봉에 서서 부상당하면서 상당한 무훈을 세우기도 하며 평생 신센구미 시절과 그닥 다를 게 없는 무사도 스타일의 인생길을 근대화 사회에서도 꿋꿋이 걸어간 대단한 인물이다. 48세에 경시청에서 퇴직한 이후는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에서 부속 박물관 수위로 근무. 하지만 그 당시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부속 박물관은 실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가들은 실제로는 검술 사범이나 수위 신분을 가장해 밀정 활동을 계속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말년은 오차노미즈 여자고등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소소한 일을 하는 회계 및 서기로 일했다하니 그 하드한 인생을 생각하면 그저 충격이다. 나이들어서 노인이 된 뒤에도 실력이 여전했는지, 근처 학교의 [[검도]]부에 견학을 가서 연습 대련을 했는데, 한창 나이의 청년인 검도부원 중에 노인인 사이토에게 당해낼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역시 노인이 된 후에 근처에서 검도를 연습하는 사람이 나무 가지에 양철 물통을 끈으로 묶어두고 찌르기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찌르기는 그냥 빨리 정확하게 찌르면 되는게 아니고 찌른 후 민첩하게 회수하는 동작이 중요하다''한번으로 죽인다는 생각을 하지마라. 몇번이고 다시 찔러라, 난 1명 죽이는데 평균적으로 3번 정도 찔렀다'라는 조언을 해주며 시연으로 목검을 쥐고 양철 물통을 찔렀는데 허공에 끈 하나로 매달린 물통이 그대로 꿰뚫렸다는 일화도 있다. 후세 창작물에서는 이 일화를 두고 '먼저 기로 관통한다면 손에 들린 것이 목검이건 진검이건 상관없이 꿰뚫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한편 자식들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에는 병에 걸려서 상당히 고통이 심했을텐데도 불구하고 죽을 때 가부좌를 하고 앉은 자세로 죽었다고 하며, 자식들에게도 늘 전장에서 [[무사]]가 지켜야 할 마음가짐을 엄격히 강조했다는 일화도 여럿 있다. 현관 뒤에 숨어 있다가 귀가하는 자식들을 '''죽도로 내려치면서''' "[[무사]]의 마음가짐이 안 되어 있다!(士道不覺悟!)"라든가 "문에 들어가면서 머리부터 들이밀면 기습당했을 때 치명상을 입는다! 발부터 들이밀어라!"라고 설교했을 정도라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